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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하루 한 문장

좋은시(달밤,흑인죠,설야,가을그대,운명을운전하다)

달밤

 

아이헨도르프

 

마치 하늘이 대지에게

살며시 입을 맞추어,

대지는 은은한 꽃빛으로

하늘을 꿈꾸는 듯 했네.

 

바람은 가벼이 들을 지나고,

이삭은 부드럽게 물결치며,

숲들은 나직이 소리 내고,

그토록 별빛 맑은 밤이었네.

 

그리고 나의 영혼은

나래를 활짝 펴고,

고요한 대지를 날아갔네,

마치 집으로 가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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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죠

 

 

신중신

 

 

나의 다정한 친구 흑인 죠의

밤에 우는 눈물에는 소금기가 많고

피는 한결 뜨겁고 진하지만

눈은 항상 아래로 접는다.

아침에는 쟁기질로 흙을 일구고

이웃의 양(羊)을 잡아주고

오후 한참은 통나무를 얻기 위해

침엽수 밑둥을 도끼로 찍었다

내려칠 때마다 나무의 하얀 육편(肉片)이 튀

어 떨어져

그는 살의 아픔을 느끼며

경련하는 잎사귀들이 삼키는 신음소리를 들었

다.

선량한 친구 흑인 죠는

단단한 어깨의 근육을 갖고

저 번들거리는 땀의 만족 끝에

밤에 누워서는 통회(痛悔)를 한다.

신(神)이 지켜주신 노동의 가르침을 다한 후

피 속에 도사려 남는 공유(共有)의 슬픔,

양과 침엽수의 눈물을 그가 흘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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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야(雪夜)

 

 

*김광균

 

 

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없이 흩날리느뇨.

처마 끝에 초롱불 여위어 가며
서글픈 옛 자췬 양 흰 눈이 내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머언 곳의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追悔)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찬란한 의상을 하고
흰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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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그대 / 강희창

 

 

그대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뜨겁게 달군 지난 날을 뒤로하고
그리움이 이리도 사무쳐 멍드는 것은
우리가 함께 할 날이 짧기 때문입니다

그대가 떠날 채비로 분주하기에
들뜬 마음 추수하고 드는 날을 골라
잊었던 화장을 한번 해봅니다
같이 걸어온 발자국만큼
같이 맞춰온 호흡만큼
서로 사랑할 날이 줄어 들었네요

남겨진 것의 애처러움과 후회스러움
그것이 싫어서 라도 아니
남겨진 흔적이 또 다른 그리움의
빌미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함께 떠나야 할 때를 압니다
그대 향한 그리움 한 점 남김 없이
다 태우고 가렵니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얼마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 주고 앙상한 뼈로 남는다 해도
또 다른 분신의 잉태를 믿기에
잊혀진다는 길고 긴 나락의 길을
차근차근 걸어 갈 수 있습니다.
벌써
금쪽같은 하루해가 이울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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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을 운전하다

 

강희창

 

그러니까 기로에서 한 쪽을 택한 사내는 비장하게
안개벽에 터널을 내듯이 차를 몰아가고 있다
돌이킬 수 없는 질주 속에 끼어드는 어리석음이라니
요절한 가수의 음울한 노래와 앰뷸런스의 비명이 섞인다
선그라스에 어둔 표정을 숨겨 보지만 전부는 아니다

핸들 가속페달 아스팔트, 모두 죽은 것들이 아닌가
갑자기 소름이 돋는다. 유턴 할 수 없는 편도 하행선
그를 지나쳐간 죽은 시간은 백미러에 들어있고
앞에는 산 시간이 목젖을 드러낸 채 달려온다
언뜻 이 질주는 시간과 시간의 부딪침처럼

누구나 빨아들일 블랙홀이 지천으로 깔려있어
속도계가 가늠해대는 촉박한 생과 사
그렇다 죽음의 지침은 그림자같이 따라붙는다
어느덧 안도의 햇빛이 비처럼 쏟아지지만
사내의 그림자는 아까 보다 더 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