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학 : 하루 한 문장

좋은시(유치환-설일,꽃,들꽃과같은,뜨거운노래는땅에묻는다,귀고)

설일(雪日)



하늘도 땅도 가림헔 수 없어

보오얀히 적설 하는 남은

한 오술길이 그대로

먼 천상의 언덕배기로 잇따라 있어

그 길을 찾아 가면

그 날 통곡하고 떠난 나의 청춘이

돌아가신 어머님과 둘이 살고 있어

밖에서 찾으면

미닫이 가만히 밀리더니

빙그레 웃으며 내다보는 흰 얼굴!



------------------------------








가을이 접어드니 어다선지

아이들은 꽃씨를 받아와 모으기를 하였다.

붕숭아 금선화 맨드라미 나팔꽃

밤에 복습도 다 마치고

제각기 잠잘 채비를 하고 자리를 들어가서도

또들 꽃씨를 두고 이야기─

우리 집에도 꽃 심을 마당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어느 덧 밤도 깊어

엄마가 이불을 고쳐 덮어 줄 때에는

이 가난한 어린 꽃들은 제각기

고운 꽃밭을 안고 곤히 잠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





들꽃과 같은─장전에서



악몽이었던 곳

어젯밤 전투기 걷혀간 자리에

쓰려져 남은 적의 젊은 시체 하나

호젓하기 차라리 한 떨기 들꽃 같아



외곬으로 외곬으로 짐승처럼 너를 쫒아

드디어 이 문 으로 몰아다 넣은 것.

그 악착스런 삶의 푹풍이 스쳐 간 이제

이렇게 누운 자리가 얼마나 안식(安息)하랴.



이제는 귀도 열렸으리.

영혼의 귀 열렸기에

묘막(渺漠)히 영원으로 울림하는

동해의 푸른 굽잇물소리도 은은히 들리리.



--------------------------------------------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고독은 욕되지 않으나

견디는 이의 값진 영광.



겨울의 숲으로 오니

그렇게 요조(窈窕)ㅎ던 빛깔도

설레이던 몸짓들도

설레이던 몸짓들도

깡그리 거두어 간 기술(奇術師)사의 모자.



앙상한 공허만이

먼 한천(寒天) 끝까지 잇닿아 있어

차라리

마음 고독한 자의 거닐기에 좋아라.



진실로 참되고 옳음이

죽어지고 숨어야 하는 이 계절엔

나의 뜨거운 노래는

여기 언 땅에 깊이 묻으리.



아아, 나의 이름은 나의 노래.

목숨보다 귀하고 높은 것.



마침 비굴한 목숨은

눈을 에이고 땅바박 옥에

무쇠 연자를 돌릴지라도

나의 노래는

비고(非道)를 치레하기에 앗기지는 않으리라.



들어 보라.

이 거짓의 거리에서 숨결쳐 오는

뭇 구호와 빈 찬양의 헛한 울림을

모두가 영혼을 팔아 예복을 입고

소리 맞춰 목청 뽐을 지라도



여기 진실은 고독히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





귀고(歸故)



검정 사포를 쓰고 똑딱선(船)을 내리면

우리 고향의 선창가는 길보다도 사람이 많았소

양지 바른 뒷산 푸른 송백(松柏)을 끼고

남쪽으로 트인 하늘은 기빨처럼 다정(多情)하고

낯설은 신작로 옆대기를 들어가니

내가 트던 돌다리와 집들이

소리높이 창가하고 돌아가던

저녁놀이 사라진 채 남아 있고

그 길을 찾아가면

우리 집은 유약국

행이불신(行而不信) 하시는 아버지께선 어느덧

돋보기를 쓰시고 나의 절을 받으시고

헌 책력(冊曆)처럼 애정에 낡으신 어머님 옆에서

나는 끼고 온 신간(新刊)을 그림책인 양 보았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