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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하루 한 문장

사람만이 희망이다 - 박노해

변화 속에서

 

사람은 세월이 쌓여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상을 잃을 때 늙어가는 것이다

이상도 하나의 생명이라서

계속 성장시키지 않으면 죽고 만다

 

사람이 저렇게 변할 수가

세월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거친 세월이 흘러도

늘 푸른 소나무처럼

변함없는 사람은

 

변한 세월만큼

변화의 빠름과 크기만큼

치열한 자기 변화를 이루어내어서

 

결코 변해서는 안 될 것을

굳건히 지켜가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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뱃속이 환한 사람

 

내가 널 좋아하는 까닭은

눈빛이 맑아서만은 아니야

 

네 뱃속에는 늘 흰 구름이

유유히 흘러가는 게 보이기 때문이다

 

흰 뱃속에서 우러나온

 

네 생각이 참 맑아서

네 분노가 참 순수해서

네 생활이 참 간소해서

욕심마저 참 아름다운 욕심이어서

 

내 속에 숨은 것들이 그만 부끄러워지는

환한 뱃속이 늘 흰 구름인 사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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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잃은 날의 지혜

 

 

큰 것을 잃어버렸을 때는

작은 진실부터 살려가십시오

 

큰 강물이 말라갈 때는

작은 물길부터 살펴주십시오

 

꽃과 열매를 보려거든 먼저

흙과 뿌리를 보살펴주십시오

 

오늘 비록 앞이 안 보인다고

그저 손 놓고 흘러가지 마십시오

 

현실을 긍정하고 세상을 배우면서도

세상을 닮지 마십시오 세상을 따르지 마십시오

 

작은 일 작은 옮음 작은 차이

작은 진보를 소중히 여기십시오

 

작은 것 속에 이미 큰 길로 나가는 빛이있고

큰 것은 작은 것들을 비추는 방편일 뿐입니다

 

현실 속에 생활 속에 이미 와 있는

좋은 세상을 앞서 사는 희망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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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고 싶은 것들

 

9시 뉴스를 진행하는 장애우 앵커를 보고 싶어

삶의 철학을 강의하는 노동자 교수를 보고 싶어

이혼한 여자가 대통령으로 뽑히는 걸 보고 싶어

동남아시아계 2세가 서울시장이 되는 걸 보고 싶어

 

서울역에서 상경하는 농사꾼에게

정중히 경례하는 경찰청장이 보고 싶어

안기부 청사에 아이들과 김밥 싸들고

격려 방문하는 시민들을 보고 싶어

자동차가 주인이 된 거리가 줄어들고

맘 놓고 달리는 자전거 물결을 보고 싶어

안 갖는 긍지로 적게 벌고 나누어 쓰자며

‘푸른 생산’을 내건 파업 노동자들을 만나고 싶어

 

북한 노동자의 손에 깨끗이 쓰러진 수령의 동상을,

항일 운동하던 시절의 김일성 장군 사진이

독립기념관에 걸려진 걸 보고 싶어

토실토실 살 오른 아프리카 아이들이

두 뺨 발그레한 남북한 아이들과 어우러져

맑은 한강에서 두만강에서 발가벗고 물장구치는

여름 캠프를 보고 싶어

 

초파일에 연동을 켜 단 교회에,

성탄절에 트리를 세운 산사에 가보고 싶어

존경받는 레즈비언 국회의원과 포옹하고 싶고

흑인 여성 교황을 만나보고 싶어

먼 행성에서 온 외계 생명과

우주영성시대를 함께 토론하고 싶어

 

무엇보다 나이 들수록 화를 적게 내고 욕심이 줄어들어

안으로 다숩게 잘 익어가는 내 모습,

돈 버는 능력보다 사랑하는 능력이 부쩍 커져서

갈수록 새로워지고 깊어지는 내 모습이 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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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해, 사람만이 희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