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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하루 한 문장

좋은 시 (음악처럼 비처럼, 빈집, shall we love,가난한 사랑노래)

가난한 사랑노래

 

신경림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머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 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 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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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erybody shall we love?

 

김선우

그러니 우리, 사랑할래요?

딱딱한 도시의 등딱지를 열고
게장 속을 비비듯
부패와 발효가 이곳에선 구분되지 않아요
그러니 잘 발효했다고 믿는 몸속에서 비벼진 밥알을
서로의 입에 떠 넣어주듯
그대를 밥 먹이는 게 내 피의 이야기인 듯

보도블록 콘크리트를 걷어내고
꽃잎을 놓은 댓잎 자리 위에 누워
우리 사랑할래요?
지나 온 가로수의 허방으로 미끄러져간 계곡과 별빛
기어코 가시에 찔리죠 가시에 찔리고 싶어 걷는 봄날엔

그러니 총 대신! 빌딩 대신! 군함 대신! 지폐 대신!
건널목을 둥글게 휘어놓고
꽃잎 물고기와 사슴을 불러 해금을 켤까요
그대와 그대가 사랑을 나눌 때
그대와 그대 곁에서
그대들 위해 군함을 쪼개 모닥불을 지필까요
무릎뼈 위에 먹을 갈아
은행잎 댓잎 위에 번갈아 편지를 쓸까요 오세요 그대,

피 흘리는 벽들이 서로의 가슴을 칠 때
진동으로 생겨난 샛강 같은 골목들
그대와 나의 혈관을 이어 across the universe!
무수한 밤이 있었지만
밤의 등골 속으로 흰 새가 내려앉는 건 드문 일이죠
오세요, 단 한 모금 물을 찾아 하염없이 걸어야 할 밤이 오더라도
오세요, 그대가 천 번을 죽어나간다 해도
난 아무 데도 안 갈 거예요
뼈마디마다 댓잎 이불 펼치고 그대 입술에 진홍꽃잎 수놓으며
여기서 사랑노랠 부를 거예요 오래전 핏속의 벌 나비 같은
그대와 나의 해골을 안고 뒹굴 거예요

포성 분분한 차디찬
여기는 망가진 빗장뼈 위 백척간두의 칼 끝
이것은 피의 이야기,
사랑을 구하는 피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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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

 

기형도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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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처럼, 비처럼

 

안현미

새춘천교회 가는 길 전생처럼 패랭이꽃 피어 있을 때
흩뿌리는 몇 개의 빗방울 당신을 향한 찬송가 같았지
그때 우리에게 허락된 양식은 가난뿐이었지만
가난한 나라의 백성들처럼 가난하기에 더 열심으로
서로가 서로를 향한 찬송가 불렀었지
누구는 그걸 사랑이라고도 부르는 모양이지만
우리는 그걸 음악이라고 불렀지
예배당 앞에 나란히 앉아 기도 대신 서로가 서로에게 담뱃불을 붙여 줬던가
그 교회 길 건너편엔 마당에 잡초 무성한 텅 빈 2층 양옥집도 있었던가
그 마당에 우리의 슬픔처럼 무성한 잡초를 모두 뽑고
당신의 눈썹처럼 가지런하게 싸리비질 하고 꼭 한 달만 살아보고 싶었던가
햇빛 좋은 날 햅쌀로 풀을 쑤어 문풍지도 바르고 싶었던가
그렇게 꼭 한 달만 살아보자고 꼬드겨 보고 싶었던가
그럴까봐 당신은 이 생에 나를 술래로 세워놓고 돌아오지 않는 기차를 탔던가
춘천을 떠나는 기차시간을 기다리다 공지천 이디오피아 창가에 앉아
돌아오지 않는 당신의 눈썹에서 주워 온 몇 개의 비애를 안주로 맥주를 마실 때
막 사랑을 하기 시작한 연인들의 백조는 물 위에서 뒤뚱뒤뚱,
그 뒤뚱거림조차 사랑이라는 걸 이제는 알겠는데
아직도 찬송가처럼 몇 개의 빗방울 흩뿌리고 있었지
누구는 그걸 사랑이라고 부르는 모양이지만
우리는 그걸 음악이라고 불렀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