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삽의 흙 / 나희덕
밭에 가서 한 삽 깊이 떠놓고
우두커니 앉아 있다
삽날에 발굴된 낯선 흙빛,
오래 묻혀 있던 돌멩이들이 깨어나고
놀라 흩어지는 벌레들과
사금파리와 마른 뿌리들로 이루어진
말의 지층
빛에 마악 깨어난 세계가
하늘을 향해 봉긋하게 엎드려 있다
묵정밭 같은 내 정수리를
누가 저렇게 한 삽 깊이 떠놓고 가버렸으면
그러면 처음 죄 지은 사람처럼
화들짝 놀란 가슴으로 엎드려 있을 텐데
물기 머금은 말들을 마구 토해낼 텐데
가슴에 오글거리던 벌레들 다 놓아줄 텐데
내 속의 사금파리에 내가 찔려 피 흘릴 텐데
마른 뿌리에 새순을 돋게 할 수는 없어도
한 번도 만져보지 못한 말을 웅얼거릴 수 있을 텐데
오늘의 경작은
깊이 떠놓은 한 삽의 흙 속으로 들어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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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論 / 마경덕
2002년 8월 10일
묵은 신발을 한 보따리 내다 버렸다.
일기를 쓰다 문득, 내가 신발을 버린 것이 아니라 신발이 나를 버렸다는 생각을 한다. 학교와 병원으로 은행과 시장으로 화장실로, 신발은 맘먹은 대로 나를 끌고 다녔다. 어디 한번이라도 막막한 세상을 맨발로 건넌 적이 있는가. 어쩌면 나를 싣고 파도를 넘어 온 한 척의 배. 과적(過積)으로 선체가 기울어버린. 선주(船主)인 나는 짐이었으므로,
일기장에 다시 쓴다.
짐을 부려놓고 먼 바다로 배들이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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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나무 / 손택수
언뜻 내민 촉들은 바깥을 향해
기세 좋게 뻗어가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제 살을 관통하여, 자신을 명중시키기 위해
일사불란하게 모여들고 있는 가지들
자신의 몸 속에 과녁을 갖고 산다
살아갈수록 중심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는 동심원, 나이테를 품고 산다
가장 먼 목표물은 언제나 내 안에 있었으니
어디로도 날아가지 못하는, 시윗줄처럼
팽팽하게 당겨진 산길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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