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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하루 한 문장

좋은 시(나목, 산책, 불이켜진창마다)

나목 - 박인걸

자신의 무성함을 뽐내며
거센 바람에 흔들려도
가지 끝의 한 잎까지도
악착같이 붙들고 살더니
입동(立冬) 앞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는구나.

남은 것 하나 없이
발가벗은 몸으로
겨울 한 복판에 선다 해도
적나라한 모습에서
너의 참 모습을 읽는다.

거칠 것 하나 없는 홀가분함
흔들리거나 꺾일 일 없는 자유
숨길 것 하나 없는 자신감
있는 그대로 다가서는 친근함
자연 그대로의 정다움에서
나도 너처럼 나목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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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 - 용혜원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찾아 있다
나만이 걷는다

시계는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시간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지치고 힘들고 어지러웠던
일상의 삶을 잠시 떠나는
쉼표의 시간이다

발끝에서 발끝으로 이어지는 길을
가볍게 걷는다
심장이 따뜻해진다

눈으로 다가오는 푸른 나무들
마음으로 생명을 읽어 내린다
코끝으로 다가오는 싱그러움을
가슴에 담는다
살아 있음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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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이 켜진 창마다 - 박목월


밤늦도록
불이 켜져있는
창을 생각한다.
불빛 앞에서
수학을 풀고 외국어를 익히고
위대한 인류의 흥망과 업적을 공부하는
젊은 날의
흰 이마와
검은 눈동자를 생각한다.
인생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내일에의 확신과 신뢰로
오늘을 가꾸는
진리의 꽃나무.
비약에의 푸른 날개.
밤 깊도록 짜고 있는
꿈의 자리.
참으로 인생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내일을 위하여
오늘의 성의를 다하는
심야의 집중
씨앗의 의지.
물론 내일은 오게 된다.
신뢰와 확신과 인내의
가지마다
만발하게 꽃피는
꽃나무의 축복.
더욱 참되게 아름답게 살려는
의욕의 지평선 위로
찬란하게 동트는
장미와 순금의 새벽.
미래의
신비스러운 베일을 벗고
면사포로 앞을 가린
소망의 신부.
정오의 하늘을 나는
희고 든든한 이상의 나래.
진실로
인생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밤 깊도록
불을 켜놓고
수학을 풀고 외국어를 익히고 역사를 공부한

넉넉한 문맥 속에서
우리의 인생은
눈물어린 눈동자에
미소를 머금고 다가온다.
그날을 위한
오늘의 발돋움
오늘의 열중.
밤늦도록 불이 켜져 있는 창마다
신의 축복이
서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