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보라 - 황지우
원효로 처마끝 양철 물고기를 건드는 눈송이 몇 점,
돌아보니 등편 규봉암으로 자욱하게 몰려가는 눈보라
눈보라는 한 사람을 단 한 사람으로만 있게 하고
눈발을 인 히말라야 소나무숲을 상봉으로 데려가버린다
눈보라여, 오류 없이 깨달음 없듯,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는 사람은 지금 후회하고 있는 사람이다
무등산 전경을 뿌옇게 좀먹는 저녁 눈보라여,
나는 벌받으러 이 산에 들어왔다
이 세상을 빠져나가는 눈보라, 눈보라
더 추운 데. 아주아주 추운 데를 나에게 남기고
이제는 괴로워하는 것도 저속하여
내 몸통을 뚫고 가는 바람 소리가 짐승 같구나
슬픔은 왜 독인가
희망은 어찌하여 광기인가
뺨 때리는 눈보라 속에서 흩어진 백만 대열을 그리는
나는 죄짓지 않으면 알 수 없는가
가면 뒤에 있는 길은 길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앞에 꼭 한 길이 있었고, 벼랑으로 가는 길도 있음을
마침내 모든 길을 끊는 눈보라, 저녁 눈보라,
다시 처음부터 걸어오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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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손 - 박 덕 중
없음에서
있음이여
있음에서
영원한 있음이여
있음에서
없음으로 돌아가게 하심이여
당신의
큰 손 하나로
그렇게 됨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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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 오는 날 - 곽재구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하늘의 별을
몇 섬이고 따올 수 있지
노래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새들이 꾸는 겨울꿈 같은 건
신비하지도 않아
첫눈 오는 날
당산 전철역 오르는 계단 위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들
가슴 속에 촛불 하나씩 켜들고
허공 속으로 지친 발걸음 옮기는 사람들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다닥다닥 뒤엉긴 이웃들의 슬픔 새로
순금빛 강물 하나 흐른다네
노래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이 세상 모든 고통의 알몸들이
사과꽃 향기를 날린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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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맑은 물살 - 곽재구
- 희문산에서
참 맑은 물살
발가락 새 헤적이네
애기 고사리순 좀 봐
사랑해야 할 날들
지천으로 솟았네
어디까지 가나
부르면 부를수록
더 뜨거워지는 너의 이름
참 고운 물살
머리카락 풀어 적셨네
출렁거리는 산들의
부신 허벅지 좀 봐
아무 때나 만나서
한몸되어 흐르는
눈물나는 저들 연분홍 사랑 좀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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