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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하루 한 문장

좋은 시 (햇빛이 말을 걸다, 감자의 맛, 뱃속이 환한 사람, 강)

햇빛이 말을 걸다 - 권대웅

길을 걷는데
햇빛이 이마를 툭 건드린다
봄이야
그 말을 하나 하려고
수백 광년을 달려온 빛 하나가
내 이마를 건드리며 떨어진 것이다

나무 한 잎 피우려고
잠든 꽃잎의 눈꺼풀 깨우려고
지상에 내려오는 햇빛들
나에게 사명을 다하며 떨어진 햇빛을 보다가
문득 나는 이 세상의 모든 햇빛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강물에게 나뭇잎에게 세상의 모든 플랑크톤들에게
말을 걸며 내려온다는 것을 알았다

반짝이며 날아가는 물방울들
초록으로 빨강으로 답하는 풀잎들 꽃들
눈부심으로 가득 차 서로 통하고 있었다

봄이야
라고 말하며 떨어지는 햇빛에 귀를 기울여본다
그의 소리를 듣고 푸른 귀 하나가
땅속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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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의 맛 - 이해인

통째로 삶은
하얀 감자를
한 개만 먹어도

마음이 따뜻하고
부드럽고
넉넉해지네

고구마처럼
달지도 않고
호박이나 가지처럼
무르지도 않으면서

싱겁지도 않은
담담하고 차분한
중용의 맛

화가 날 때는
감자를 먹으면서
모난 마음을 달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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뱃속이 환한 사람 - 박노해

내가 널 좋아하는 까닭은
눈빛이 맑아서만은 아니야

네 뱃속에는 늘 흰 구름이
유유히 흘러가는 게 보이기 때문이야

흰 뱃속에서 우러나온

네 생각이 참 맑아서
네 분노가 참 순수해서
네 생활이 참 간소해서
욕심마저 참 아름다운 욕심이어서

내 속에 숨은 것들이 그만 부끄러워지는
환한 뱃속이 늘 흰 구름인 사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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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 황 인 숙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칠 것 같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찬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