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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하루 한 문장

좋은 시 모음 1(유리상자 안의 신화, 나무, 처음처럼, 벽지를 바르며)

유리상자 안의 신화 - 박건호

나는 어렸을 때
하늘에 사람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런 일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초등학교 시절에 알았다
그래서 비밀을 간직하기 시작했다
뒷편 서낭나무에서 잡아오던 귀신도
여름 밤 우물가에 날아다니던 도깨비 불도
보지 않았던 것으로 했다
세상을 알지 말자
세상은 알면 아는 것 만큼 꿈들이 무너진다
그리하여 나의 어린 시절은 설레임과 함께
신화의 기슭으로 흘러갔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가
첨단과학 시대인 요즈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사건들이
가끔씩 나를 놀라게 한다
유리상자 안에서 시치미를 떼는 자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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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 김용택

강가에 키 큰 미루나무 한 그루 서 있었지
봄이었어
나, 그 나무에 기대앉아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지

강가에 키 큰 미루나무 한 그루 서 있었지
여름이었어
나, 그 나무 아래 누워 강물 소리를 멀리 들었지

강가에 키 큰 미루나무 한 그루 서 있었지
가을이었어
나, 그 나무에 기대서서 멀리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지

강가에 키 큰 미루나무 한 그루 서 있었지
강물에 눈이 오고 있었어
강물은 깊어졌어
한없이 깊어졌어

강가에 키 큰 미루나무 한 그루 서 있었지 다시 봄이었어
나, 그 나무에 기대앉아 있었지
그냥,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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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처럼 - 안도현

 

이사를 가려고 아버지가
벽에 걸린 액자를 떼어냈다
바로 그 자리에
빛이 바래지 않은 벽지가
새것 그대로
남아 있다
이 집에 이사 와서
벽지를 처음 바를 때
그 마음
그 첫 마음,
떠나더라도 잊지 말라고
액자 크기만큼 하얗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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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지를 바르며 - 고광근

 

일요일 아침
우리 가족 벽지를 바른다.
돌돌 감긴 벽지를 펼치니
화들짝 피어나는 꽃무늬

새해에는 넓은 집으로
이사할 거라던 어머니
이사 대신
누렇게 바래 버린 벽지 위에
새하얀 꽃무늬 벽지를 바른다.
우리 가족 서투른 도배는
꽃무늬가 자꾸 어긋나고
쭈글쭈글 오그라들어도 신이 났다.

한나절 도배를 하고 돌아보니
벽마다 활짝 핀 꽃송이
우리 가족 웃음 송이
하늘도 새로 도배를 했는지
구름무늬 푸른 벽지를 두르고
창문 가득히 푸르게 비쳐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