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학 : 하루 한 문장

좋은 시 (기적, 말빛, 아버지의 등을 밀며)

아버지의 등을 밀며 - 손택수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엘 가지 않았다
여덟 살 무렵까지 나는 할 수 없이
누이들과 함께 어머니 손을 잡고 여탕엘 들어가야 했다
누가 물으면 어머니가 미리 일러준 대로
다섯 살이라고 거짓말을 하곤 했는데
언젠가 한 번은 입 속에 준비해둔 다섯 살 대신
일곱 살이 튀어나와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나이보다 실하게 여물었구나, 누가 고추를 만지기라도 하면
어쩔 줄 모르고 물 속으로 텀벙 뛰어들던 목욕탕
어머니를 따라갈 수 없으리만치 커버린 뒤론
함께 와서 서로 등을 밀어주는 부자들을
은근히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하였다
그때마다 혼자서 원망했고, 좀 더 철이 들어서는
돈이 무서워서 목욕탕도 가지 않는 걸 거라고
아무렇게나 함부로 비난했던 아버지
등짝에 살이 시커멓게 죽은 지게자국을 본 건
당신이 쓰러지고 난 뒤의 일이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까지 실려온 뒤의 일이다
그렇게 밀어 드리고 싶었지만, 부끄러워서 차마
자식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던 등
해 지면 달 지고, 달 지면 해를 지고 걸어온 길 끝
적막하디적막한 등짝에 낙인처럼 찍혀 지워지지 않는 지게자국
아버지는 병원 욕실에 업혀 들어와서야 비로소
자식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신 것이었다

 

-----------------------------------------------------------------------

 

말빛 - 이희중

 

 

그때 내게 말했어야 했다

내가 그 책들을 읽으려 할 때

그 산을 오르기 위해 먼 길을 떠날 때

그 사람들과 어울릴 때

곁에서 당신들은 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삶은 결국 내가 그 책을 읽은 후 어두워졌고

그 산을 오르내리며 용렬해졌으며

그 사람들을 만나며 비루해졌다

그때 덜 자란 나는 누구에겐가 기대야 했고

그런 내게 당신들은 도리 없는 범례였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내게 그 말을 해야 했다면,

누구한테선가 내가 그 말을 들어야 했다면

그 누구도 필경 당신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당신들은 늘

말을 아꼈고 지혜를 아꼈고 사랑과 겸허의 눈빛조차 아꼈고

당신들의 행동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한테도

사과와 사죄의 말 없이 침묵하였다

당신들에게 듣지 못한 말 때문에 내 몸속에서는 불이 자랐다

이제 말하라, 수많은 그때 당신들이 내게 해야 했던,

그때 하지 않음으로써 그 순간들을 흑백의 풍경으로 얼어붙게 한

그 하찮은 일상의 말들을 더 늦기 전에 내게 하라

아직도 내 잠자리를 평온하게 할 것은,

내가 간절히 듣고 싶엇으나 당신들이 한사코 하지 않은 그 말뿐

 

----------------------------------------------------------------------------

 

기적 - 마종기

 

 

추운 밤 참아낸 여명을 지켜보다

새벽이 천천히 문 여는 소리 들으면

하루의 모든 시작은 기적이로구나.

 

지난날 나를 지켜준 마지막 별자리,

환해오는 하늘 향해 먼 길 떠날 때

누구는 하고 싶었던 말 다 하고 가리

또 보세, 그래, 이런 거야, 잠시 만나고ㅡ

 

길든 개울물 소리 흐려지는 방향에서

안개의 혼들이 기지개 켜며 깨어나고

작고 여린 무지개 몇 개씩 골라

이 아침의 두 손을 씻어주고 있다.